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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 등이 무신년에 밀풍군을 추대하여 일으킨 무신지변(戊申之變)
 김민수
 2015-01-12 20:08:54  |   조회: 8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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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좌 등이 무신년에 밀풍군을 추대하여 일으킨 무신지변(戊申之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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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7(영조 3)년 9월 2일 성류(星流)가 하고성(河鼓星) 아래를 지나 남방(南方)으로 들어갔는데 빛은 번갯불 같았고 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점사(占辭)에 ‘하고(河鼓)가 땅을 진동시켰으니 마땅히 병란(兵亂)이 있을 것이다.’ 했는데 얼마 안 되어 미기(未幾)에 김일경(金一鏡)의 여당(餘黨)인 이인좌(李麟佐) 등이 무신년(영조 4년)에 밀풍군(密豐君) 이탄(李坦)을 추대하여 병란(兵亂)을 일으킨 무신지변(戊申之變)이 있었다. 11월 11일 형혹성(熒惑星)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가니, 이는 내란이나 전쟁의 기운이 나타날 천재지변의 징조인 병상(兵象)인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이인좌 등이 무신년에 밀풍군을 추대하여 일으킨 무신지변(戊申之變)이 있었다.



무신년인 1728(영조 4)년 3월 18일 영조가 김중만(金重萬)과 신광원(愼光遠)을 대질(對質)하게 하였다. 김중만이 신광원에게 말하기를 “초 7일에 너와 권서린(權瑞麟)의 집에서 함께 자면서 나와 용인(龍仁)김종윤(金宗胤)이 팔씨름을 하자, 네가 ‘팔씨름으로는 그 힘이 많고 적음을 알기에는 부족하다.’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 후 내가 다시 권서린의 집에 도착하니, 권서린이 말하기를 ‘신광원이 그 사이에 다시 다녀갔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인좌(李麟佐)가 11일에 회합하기로 약속을 하였는데 오지 않으니 의아하게 여길 만하다. 이인좌는 재능이 상장(上將)이 될 만하고 너는 부장(副將)이 될 만하다.’고 하였다.”하니, 신광원이 말하기를 “나는 본시 네 얼굴을 모르며, 이인좌는 상장이 될 만하고 내가 부장이 될 만하다면 내가 어찌 부장이 되지 못하고 집에 있다 붙잡혔겠는가?”하였다.



김중만이 말하기를 “너희가 행인(行人)처럼 꾸며 백의(白衣)로 올라오려고 했으니, 네 귀가(歸家)는 괴이할 것이 없다. 또 네가 일찍이 당나귀를 타고 권서린의 집에 가지 않았느냐? 나와 서로 만나 내가 누구냐고 물으니, 권서린이 말하기를 ‘이는 능히 남산(南山) 소나무를 뽑은 신광원이다.’ 하자, 네가 ‘우연히 장차 넘어질 소나무를 뽑은 것이 어찌 이상하겠는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내가 또 한 마디로 증거할 만한 것이 있다. 초이렛날에 권서린의 집에서 함께 만났는데 좌중에서 이인좌의 용력을 칭찬하자, 네가 ‘이인좌의 할아버지 이운징(李雲徵)이 신력(神力)이 있었기 때문에 그 손자도 내맥(來脈)이 있는 것인가?’라고 하지 않았느냐? 네가 그 당시 나를 깔보아 네가 중군(中軍)이 되면 나를 초관(哨官)으로 삼으려고 했었다.



너희들이 혹 2백 냥의 돈을 내고 혹은 3백 냥의 돈을 내거나 혹은 볏섬을 내어 좋은 말과 좋은 옷을 샀는데, 내가 당시 말이 없는지라 네가 말하기를 ‘마땅히 말을 사서 주겠다.’라고 했는데, 가천(加川)의 역마(驛馬)도 어찌 빼앗지 않았느냐? 최경우(崔擎宇)는 상인(喪人)의 몸으로 가서 참석하였는데, 그때 너 역시 좌중에 있지 않았느냐?”하니, 신광원이 말하기를 “너는 모의에 참여한 자이기 때문에 최경우·이인좌의 무리를 알지만, 나는 처음부터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직 이인좌만 대략 알 뿐 나머지는 모두 모른다.”하였다. 김중만이 말하기를 “너와 권서린 등이 ‘거사할 때 먼저 영상(領相)·병판(兵判)과 양국(兩局)의 대장을 제거해야 한다.’라고 하지 않았느냐?”하니 신광원이 말하기를 “조정에 있는 사람이 어찌 유독 영상·병판과 양국의 대장뿐이겠는가?”하였다.



김중만이 말하기를 “영상·병판과 양국의 대장을 너희들이 모두 꺼려했기 때문에 이같이 말했던 것이다.”하였다. 신광원에게 1차 형신을 하니, 신광원이 공술하기를 “전(前) 참봉(參奉) 이하(李河)는 이명세(李命世)의 아들로 주동(鑄洞)에 살고 있는 자인데, 민관효(閔觀孝) 등과 말하기를 ‘평안 병사(平安 兵使) 이사성(李思晟)이 군사를 출동시켜 한성으로 올 것이고, 훈련대장(訓鍊大將)은 국가에 재생(再生)의 은혜가 있으며, 영의정은 충절이 있어 반드시 하지 않을 것이나 남태징(南泰徵)·남태적(南泰績)·이정(李檉) 등은 밀풍군(密豐君)을 추대하고자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하가 또 말하기를 ‘양명하(粱命夏) 및 용인의 사인(士人) 안엽(安熀)을 평안 병영으로 내려 보냈다.’ 하였고, 이하(李河)와 민관효가 말하기를 ‘영남(嶺南) 및 경기 안성인 양성(陽城)의 군사가 출동하여 장차 3월 20일에 대궐을 범할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신이 양성을 왕래한 일은 김중만의 말이 사실입니다.”하였다.



3월 26일 영조가 인정문(仁政門)에 임어하여 친국(親鞫)하였다. 이인좌(李麟佐)를 형신(刑訊)하니 이인좌가 공초하기를 “한세홍(韓世弘)·이유익(李有翼)·이하(李河)·남태적(南泰績)·남태징(南泰徵)·김중기(金重器)가 이 일을 하였고, 임서호(任瑞虎)·조관규(趙觀奎)·임서봉(任瑞鳳)·임서린(任緖麟)·조덕징(趙德徵)·이배(李培)·이만(李晩)·이의형(李義衡)은 이 번에 양성(陽城)에 모여 곧바로 청주(淸州)로 달려갔는데, 그 때 모인 자 정행민(鄭行旻)·원만주(元萬周)는 양성에 살고, 권서봉(權瑞鳳)은 수원에 살며, 조동규(趙東奎)는 서울 향교동(鄕校洞)에 살았습니다. 권서린(權瑞麟)·권서룡(權瑞龍)·목함경(睦涵敬)은 경기 안성인 양성(陽城)에 살고, 이지경(李之景)은 청주에 살며, 종사관(從事官) 류급(柳伋)은 양성에 사는데 6월과 12월에 관리의 치적을 심사하는 인사(人事)에 관한 명부(名簿)인 도목(都目)을 가지고 도망하였습니다.



청주에서 변란을 일으킬 때 부원수(副元帥)는 정행민·이계윤(李季胤)이 함께 하였는데, 병사(兵使)는 이배(李培)가 죽였으며, 영장(營將)은 목함경(睦涵敬)이 죽였습니다. 권서봉을 청주 원으로 삼고 안성(安城)에 왔고, 가병사(假兵使)는 신경제(申慶濟)의 손자 ·신천영(申天永)으로 정했습니다. 군사는 양성에 있을 때 2초(哨)였는데, 관문(關文)을 내어 징병했더니, 청안(淸安)의 원과 진천(鎭川)의 원은 도주하고, 장교(將校)가 군사를 이끌고 왔으며, 회인(懷仁)의 원 역시 도주했는데, 장교가 군사 15명을 이끌고 오니 박종원(朴宗元)이 투항하였습니다. 종사관(從事官) 류급이 흉관(凶關)과 흉격(凶檄)을 썼고, 외원(外援)에 대해서는 한세홍이 ‘호남 변산(邊山) 도적(盜賊)이 2초가 있고, 또 심유현(沈維賢)·박필현(朴弼顯)의 군사가 있으며, 나주(羅州)에서 나숭대(羅崇大)가 가정(家丁)과 족속(族屬)을 이끌고 오고, 평안 병사로 이사성(李思晟)이 들어올 것이다.’하였는데, 한세홍은 평안 병영(兵營)으로 내려갔습니다.



이호(李昈)는 양성에 사는데 모은 군사가 2초이고, 영남은 정희양(鄭希亮)이 안음(安陰)에 사는데 이 번에는 오지 않았으나 이제 영남에 있으면서 군사를 동원하였으며 정희양의 족속이 많이 들어왔다고 하였습니다. 김홍수(金弘壽)는 상주(尙州)에 사는데 군사의 숫자는 군사를 동원하기 전에는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무려 1천여 명은 됩니다. 당초에 기일을 3월 초 10일로 기약했으나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습니다. 신은 응병(應兵)이 당도하였기 때문에 15일에 과연 군사를 일으키면서 임서린으로 하여금 탐지하도록 했는데 아직껏 한성에 오지 않았습니다. 내응(內應)은 신으로 하여금 군사를 일으키게 하여 만약 영남·호남에서 군사를 동원하면 연곡(輦轂)의 친병(親兵)이 마땅히 모두 출정(出征)하게 될 것이니, 남태징·남태적이 한성의 일을 하되, 한성은 이유익이 주장하고 영남은 정희양이 하며, 그 나머지 김홍수 등 6, 7인이 돕기로 했습니다.



정희양은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후손인데, 1백 20명을 모아 이 일을 하고자 하였습니다. 신의 선봉(先鋒) 정중복(鄭重復)은 양성에 살며, 중군(中軍) 이배(李培), 부장(副將) 정행민(鄭行旻), 진용 도위(進勇 都尉) 목함경(睦涵敬)·이의형(李義衡)이 하였습니다. 이유익·한세홍이 항상 밀풍군(密豐君)이 인망(人望)이 있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유익이 가서 보고 말하였더니, 밀풍군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금 년 정월에 신이 상경하여 이하(李河)의 집을 방문했더니 이하가 말하기를 ‘일은 한계(限界)인 애안(涯岸)이 없고, 동당(同黨)이 매우 적다.’고 하기에 신이 꾸짖어 말하기를 ‘그렇다면 왜 시골에 있는 자를 일으켜 일을 하려 했느냐?’ 하였더니 이하가 말하기를 ‘이는 마치 언덕에 올라 걷는 것과 같은데 어찌 중지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권서린(權瑞麟) 역시 와서 이유익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장차 다 죽고 말 것이다.’ 하니, 이유익이 말하기를 ‘권서린으로 하여금 군인을 거두어 입성시켜 반역하게 하자.’ 하기에, 신은 불가하다고 하였습니다.



이하와 이유익은 말하기를 ‘우리들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내가 장차 너를 죽이겠다.’ 하였고, 권서린은 말하기를 ‘영남을 탐지하는 일은 밖으로부터 기병(起兵)을 해야 가하다.’ 하였습니다. 신이 정월에 영남으로 내려가 김홍수와 정희양의 집에서 탐지했더니, 1백20명의 군사로 하고 날짜는 초 10일이라고 했습니다. 신이 이런 일을 알고 돌아와 장차 응병하고자 하여 15일에 과연 거사하였습니다. 호남의 허실(虛實)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신의 동생이 5형제인데, 이웅좌(李熊佐)가 울면서 말렸고 기타 형제는 이준좌(李駿佐)·이기좌(李騏佐)이며, 끝의 동생은 아명(兒名)이 기아(夔兒)입니다. 신의 이름은 본래 현좌(玄佐)였는데 인좌로 고쳤습니다. 신이 봄에 동성(同姓) 5촌(寸)인 이홍부(李弘溥)의 집에 올라왔는데, 이홍부가 풍설에 대해 묻고는 인하여 말하기를 ‘왜 박필현과 사귀어 남의 말을 듣게 하느냐? 근신하라.’고 경계하였습니다. 뱍필현은 재작년 상주(尙州)로 이사할 때 보아 잘 압니다.



모의(謀議)는 모두 박필현이 지시했으며 자객(刺客)은 반드시 정행민이 보냈을 것이고 자객이 될 만한 자는 목함경(睦涵敬)과 정중복(鄭重復)·정중익(鄭重益) 등 형제이며 직산(稷山)에 사는 권서린 역시 용력이 있고, 박준(朴晙)은 죽산에 살며 역시 용력이 있는데 군중에 와 있었고, 정중려(鄭重勵)는 직산에 삽니다. 이 밖에는 용력이 있는 자는 없습니다. 정행민과는 영(營)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들으니 정행민이 효용(驍勇)한 무사를 뽑아 자객으로 보냈다고 합니다. 권서룡은 15일에 한성으로 보냈더니 겁이 나서 들어가지 못하고 돌아왔는데, 경상도에서 초닷새에 기병한다고 잘못 전해졌기 때문에 신들 역시 지레 먼저 기병한 것입니다. 청주 병사를 반드시 먼저 제거해야 일이 완비되고, 고단(孤單)한 군졸로는 한성으로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먼저 청주를 함락시킨 것입니다. 경중(京中)을 정탐하기 위해 박준(朴晙)을 올려 보냈으나 아직까지 소식이 없었습니다.



지금은 이유익의 집에 보냈는데 모양은 구레나룻인 늑염(勒髥)이 있고 복색(服色)은 도포(道袍)를 입었으며 18일에 올라왔습니다. 김중만(金重萬) 역시 알았는데 중간에서 약속을 어기고 속였습니다. 권서린은 중간 키에 수염이 조금 나고 얼굴이 얽었으며 백포(白布) 도포를 입었는데 역시 이유익의 집으로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습니다. 이징관(李徵觀) 역시 동당(同黨)인 듯한데, 동당과 약속하기를 ‘비록 패하더라도 다시 청주에서 만나 성을 지킬 수 있으면 지키고, 지킬 수 없으면 재를 넘어 함께 태백산(太白山)으로 들어가자.’고 하였습니다. 정행민이 변산(邊山)의 도적과 통하며 금방 올라온다고 하였으나 소식이 없고, 청주에 남아 있는 병사는 모두 관군입니다. 신이 대원수(大元帥)가 된 것은 바로 적도 가운데 권서린 무리가 모두 추존(推尊)하여 삼은 것이며, 홍양산(紅涼傘)은 신이 스스로 대역 부도(大逆 不道)의 일을 한 것입니다.



정행민(鄭行旻)은 바로 고(故) 상신(相臣) 정인지(鄭麟趾)의 후손입니다. 이유익과 조덕징(趙德徵)이 밀풍군(密豐君)의 집을 왕래한 것은 대개 조덕징이 밀풍군의 처질(妻姪)이기 때문인데, 이유익이 직접 가지 않고 조덕징을 시켜 탐문(探問)하기를 ‘외간에 이러한 말이 있다.’고 하니, 밀풍군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덕징은 나이 스무 살 남짓되며 이삼(李森)은 그 안에 들지 않아서 처음에는 이유익과 더불어 제거할 뜻이 있었습니다. 남태적(南泰績)의 일은 신이 이유익과 한세홍에게서 들었는데, 남태적은 꾀를 써서 피하였고 남태징은 어리석은 자라서 그 가운데 들었습니다. 이유익이 말하기를 ‘이사주(李思周)와 밀풍군은 4촌(四寸)이 되므로, 만약 영남으로부터 오게 되면 마땅히 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괘서(卦書)의 일은 이하가 전라도에 가서 들으니, 나씨(羅氏) 성을 가진 사람과 산음(山陰) 사는 정가(鄭哥)가 했다고 합니다. 나가(羅哥)에게 물으면 알 수 있는데, 나가는 바로 나숭대(羅崇大)의 7촌숙(七寸叔) 나만치(羅晩致)입니다.



황익재(黃翼再)와 김홍수(金弘壽)는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여서 김홍수는 말하기를 ‘마땅히 함께 일을 할 듯하다.’ 하였는데, 신은 단지 김홍수의 말만 들었지 황익재의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임서호(任瑞虎)는 신이 아는데 역모에 동참(同參)한 것이 확실합니다. 조관규(趙觀奎)는 신이 알지 못하나 임서호가 동참했다고 말하였으며, 조덕징은 신이 알고 있었는데, 얼굴을 보기 전에 이미 들었습니다. 정월에 왔을 때 이하(李河)의 집에서 동참하여 난만하게 모의하였는데, 그가 비록 나이가 젊어 주장(主張)하지는 못했으나 동참한 것은 확실합니다. 이만(李晩)과 이의형(李義衡)은 군중(軍中)에 갔으며, 조동규(趙東奎)는 신이 알지 못하고 단지 임서호의 말을 들었을 뿐입니다. 나숭대는 신이 모르는 사이지만 역모한 것이 확실합니다.”하였다.



1890년 1월 27일 고조가 전교하기를 “우리 영조 대왕(英祖大王)의 묘호(廟號)를 추증(追贈)했으니 훌륭한 공적이 더욱 빛날 것이다. 영원히 의심할 바 없는 의논이 오늘을 기다린 것 같다. 옛 날을 슬퍼하고 새로 영광을 드리니 귀신과 사람이 모두 기뻐하리라. 아! 무신년(1728)의 무신지변을 오히려 어찌 말하겠는가? 태묘(太廟) 사직이 위기일발에 처했으나 다행히 신무(神武)에 힘입어 제사를 그만둠이 없게 되어 우리 왕업을 반석같이 다져지게 하였으니 아! 훌륭하다. 다만 충성에 보답하고 공로를 기록하는 절차는 옛 날에도 지극하게 하지 않은 바가 아니었지만 이렇게 성대하게 예식을 거행하는 때에 성의를 표시하는 조치가 없을 수 없다. 고(故) 봉조하(奉朝賀) 최규서(崔奎瑞),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 오명항(吳命恒)의 사판(祠版)에 예관(禮官)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충민공(忠愍公) 이봉상(李鳳祥), 충장공(忠壯公) 남연년(南延年), 충강공(忠剛公) 홍림(洪霖)에게도 똑같이 치제하게 하라.





그 밖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과 공로 있는 사람들로서 보답하고 벼슬을 추증할 만한 사람들과 그들의 사손(祀孫)으로서 등용할 만한 사람들을 의정부(議政府)에서 문건을 소급해 조사하여 계품(啓稟)하여 시행하도록 하라. 이렇게 전례(典禮)를 크게 거행하게 되니 옛 일에 대한 감회가 더욱 깊어진다. 충헌공(忠獻公) 김창집(金昌集), 충문공(忠文公) 이이명(李頤命), 충익공(忠翼公) 조태채(趙泰采), 충민공(忠愍公) 이건명(李健命)의 사판에 승지를 보내어 치제하되 만일 지방에 있으면 지방관(地方官)을 보내 치제하게 하라. 충정공(忠定公) 이홍술(李弘述), 경무공(景武公) 이우항(李宇恒), 충민공(忠愍公) 윤각(尹慤), 충장공(忠莊公) 백시구(白時耉), 충목공(忠穆公) 이상집(李尙집), 장민공(壯愍公) 심진(沈榗), 무민공(武愍公) 류취장(柳就章), 충의공(忠毅公) 김시태(金時泰)의 사당에는 예조(禮曹)의 관리를 보내 똑같이 치제하게 하라.”하였다.
2015-01-12 20: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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